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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과 계시
유마  2004-09-01 13:49:17, 조회 : 7,897, 추천 : 376

   열반과 계시....          


   열반(涅槃).
    
    "사리푸타(舍利弗)여, '열반, 열반' 하고 말하지만, 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
  이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相應部經典] 38:1 浬槃)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불교인이 기어이 실현코자 하는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반(nibbana)이라 일컬어지는 경지이다.
  이상의 경지는 사람과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죽어서 천국에 태어
난다든지,   제천(諸天: 여러 신)이 있는 곳에 왕생한다든지 하는 것을
이상으로 그리는 종교도 있다.  또 현세에서의 번영이나 행복을 궁극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중에서 열반을 인간의
이상으로 여기는  불교의 사고 방식은 반드시  그 유례가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시대의 인도에 그리 보편화되어 있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경([중부 경전] 72 파차구다화유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 34:
24 견)에 의하면,   붓다는 바차(婆蹉)라는 외도의 방문을 받아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먼저 그 외도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
적인 문제에 대해 붓다의 소견을 물었고, 붓다는 그런 문제가 해탈, 열
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견해 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차는 문제를 바꾸어 그 해탈, 열반에 대해 따지고 들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그 해탈한 사람은 어디에 가서 태어나는 것입
  니까?"
    "바차여, 그것은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안 간다는 것입니까?"
    "가서 태어난다든지,  태어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
  다."
  
  그는 열반에 대해 물었던 것이지만, 그 착안점이 전혀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해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붓다 쪽에서 그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생각을 유도해 갔다.  경전의 이런 서술로 보아도, 이 열반이라는
개념은 그 당시의 인도에서는 아직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개
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붓다는 어떤 질문으로 그 외도를 이끌어 갔는지 살펴보자.
  
    "바차여,  그대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 하면 이
  가르침은 심히 깊고, 알기 어렵고, 미묘하여,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다른 사상을 따르는 이나 다른 실천 법을 닦는 이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바차여, 만약 여기
  에 불이 타고 있다 할 때,  그대는 그것을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독자들은 아마도 이상스런 질문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나,  이런 데에
도 현실을 직시해 가는 붓다의 사상적 자세가 보인다.  물론 바차는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바차가 아니더라도 이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
으리라. 그러자 붓다의 이상한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
  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
  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
  었으므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이 이상스런 문답으로  붓다는 열반을 설명해 갈 터전을 닦았던 것이
다. 그래서 붓다는 순순히 이런 말씀으로 타일렀다.

    "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
  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
  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
  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 하는 것
  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난 바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일
생을 통해 충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쨌든 여기에
전개된 문답은  불교의 이상인 열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더욱이 거기에 사용된 비유는 단순한 비유로만은 보기 어려울 정
도로 열반의 개념에 밀착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저 열반이란 그
원어(Pali, nibbana ; Skt.,nirvana)의 뜻을 캐어 볼 때 '불이 꺼진 상
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를 붓다는 어디로부터 가져왔던 것일까?  이런 문제를 캐기
란 쉽지 않겠지만,  요컨대 그 출처는 붓다의 사상 자체에 있었던 것이
라고나 해야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아주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연소'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다. 유럽의 불
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산상 수훈'에 비교하여 '산상 설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바
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로부터 다시 마가다
국의 우루베라 - 정각한 곳 - 로 돌아온 붓다는 거기서 많은 제자를 얻
었다.  그 수효는 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제자들을 이끌고 붓다는
다시 그 나라의 수도인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나갔던 것이지만,  그 출
발에 즈음하여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간 일이 있
다.  산상에 올라서 바라보매, 추억 많은 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
북쪽으로는 아득히 가야(伽耶)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서
흐르는 것은 네란자라 강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그것을 따라 멀리 남녘
으로 눈을 옮기니 정각을 성취했던 고장이 보였다.  이 장한 조망을 발
아래 놓고 붓다는 새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그것은 붓다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는 고조된 욕
망을 말하는 데 '갈애'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찬가지
로 욕망의 고조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연소'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을 따라 오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 '욕망의 불꽃'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
난 용어로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
인 표현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 앉혀야 한
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
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
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至福)
이니 하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 멸지(灰身滅智 ; 육체적,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끊
어진 상태.)의 경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눈을 돌이켜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글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자푸카다카(閻浮車)라는 외도가 사리푸타를 찾아와서 벌인 문
답이다. 그 사람은 낡은 주석에 의하면 사리푸타의 조카라고 되어 있거
니와,  어쨌든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듯해서,  잔푸카다카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관해  꼬치꼬치 물은 데 대하여  사리푸타는 하나하나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은 붓다의 설명 방식과는 약간 달라서
정의적, 주석 적인 점은 있으나,  역시 붓다의 수제자답게 참으로 명쾌
하다고 하여야겠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열 여섯 개의 경에 기록되어
그것들이 일련의 경군(經群;염부거상응)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의 내용이 이 열반에 관한 문답이다.
  흔히들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는 것이 이
외도의 질문 내용이었다.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면,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사리푸타
는 이렇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그리고 사리푸타는
  
    "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명쾌한 주석이어서,  열반에 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여기에 딴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을 애매 모호하게
만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
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에 의해 현대인들은 어쩌면 열반
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인간의 이상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불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이상이 불교만의 주장이었다면, 우리는 도리어 의
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 관념을 검토해 보아야 했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널리 세계의 온갖 사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현대인의 입
장에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
다.
  그 중에서도 언어 표현상 가장 비슷한 것은 스토아(Stoa)의 철인들이
인간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관념이다.
그들도 또한 인간의 불행은 격정(pathos)에 의해 이성이 방해되고 영혼
이 구속됨으로써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격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최고의 이상이라 여겨, 그것을 아파테이아라
고 불렸다.
  또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kouros)가  '아타락티아(ataraktia)'라고
부른 경지도 그것에 가깝다. 그것은 어지러움이 극복된 내적 평화의 상
태를 말한다.  저 쾌락주의자들이 그려 낸 인간의 최고 경지가 이런 것
이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근대에 와서 칸트(D
ant)가 말한 '자유'의 개념 또한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그것이 자율적 자유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 때 그것은 방종의 타율이라고 했다. 그런
것에서  우리는 열반의 생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일찍이 붓다는 어떤 경([상응부 경전] 1:63 갈애)에서 이렇게 말하였
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예속시키도다.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
기에서 "소멸하여"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
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계시....
 
1.종교학적 의미: 계시란 말마디는 어원적으로 '드러나다','나타
나다','열어 밝히다'(revelare)라고 하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계시'란 일반적으로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를 나타내다', '자기를 열어 밝히다'라는 의
미를 갖는다. 종교에 있어서 그 토대가 되는 것은 '거룩한 것'(Das
Heilige)이다. 따라서 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라는 개념은 흔히 '
거룩한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자신을 열어 밝히다
(Hierophania) 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Mysterium)이다, 다시 말
해서 '거룩한 것'은 스스로 자기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의 장
막 속에 자기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거룩한 것'
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일상생활에
서 접촉하고 있는 사물 또는 사건들은 드러나 있다. 감추어져 있지 않
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
는 그들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두가
'속(俗)된 것'들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속된것'이며, 또한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와
는 달리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
둠 속에 자기 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 '거룩한 것'을
결코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 없다.

이 '거룩한 것'은 때때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기자신을 드러낸
다. 일정한 장소, 일정한 역사속에서 자기자신을 열어 밝힌다.그러나
'거룩한 것'은 이 때 자기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자기자신을 나타낸다. 다만
다른 것 즉 '속된 것'을 매개로 해서만이 자기자신을 열어 밝혀 준다.
'거룩한 것'은 때로는 일정한 사물 즉 나무.바위.하늘 등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드러낸다.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들 사물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사람들이 흔히 오래된 고목나무 앞에서 또
는 커다란 바위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나무 또
는 바위를 통해서 '거룩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두려워 하고 경천사상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하늘을 매개로
하여 '거룩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은 또한 때때로 일정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되는
인간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열어 밝혀 준다. 사람들이 흔히 어떤 인간
즉 예언자나 성자를 두려워 하고 경외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예언
자나 성자를 통해서 '거룩한 것'을 얻어 만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거룩한 것'은 그것이 자기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
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속에서 자기자신을 한정시키게 된다. 다
른 사물이 아닌 바로 이 '사물'에, 그리고 다른 사건이 아닌 이 '사
건'에 제한하여 자기자신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다른 나무가 아닌 바로 구체적인 이 나무만이 '거룩한' 나
무로, 그리고 다른 사건이 아닌 바로 구체적인 이 사건 만이 '거룩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아닌 바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 사람만이 '거룩한' 인간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형태의 종교들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세상에는 다만 하나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게 된다.

2. 성서적 의미: 그리스도교의 계시 개념은 여타 종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계시 개념과 일치하고 있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성서 안에서
는 계시자인 '거룩한 것'이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으로 명확하게 드
러나고 있다. 즉 성서적 계시는 가장 거룩한 존재자로서의 인격적 신
이 자유로이 자기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러나
성서 안에서 '계시'를 표현하는 용어는 단일하고 명확하기보다 다양한
데, 이는 성서가 계시에 대한 개념 내지 반성보다는 계시의 사실과 그
사건 자체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성서적 계시는 역사적 행위 안
에서 완성된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느님은 시간의 제약 안에 들어오셔
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자신을 그러내시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구약성서는 스스로 추상적 사고단계내에서 하나의 신을
유출해 내고 있지 않다. 구약성서는 오히려 신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
하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만 바로소 신은 인식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명 4:32 이하).

하느님의 계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삶이었
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생존을 유지하였다. 그래
서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이사 64:1이하),자신의 권능을(예레
16:21), 자신의 위대한 일을(하바 3:2), 자신의 도우심(시편 98:2)을
계시하시며, 그것들만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알리고 계시다. 그런데 하
느님의 계시는 바로 역사 내에서 발생하므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
느님의 역사는 하느님 계시의 대상이요 수단이 된다. 하느님은 특정
인물들을 통하여(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자신을 계시하시며, 또한
폭풍이나 구름, 기동, 불기동,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형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이는 하느님이 이 세계 내에서 매개물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형태들로서, 하느님 계시의 역사 관련성을
표현하고 있다(출애 19:16, 14:24, 2사무 5:24, 1열왕 19:12, 시편
8:4,19:2), 또한 계약의 궤, 천막, 성전, 하느님의 지팡이, 희생제물
등이 계시의 특정장소로 등장하는 것은 계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는 역사 내에서의 하느님 의지의 계시를 현시함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동시에 인간이 결정을 내려야하는 장소가 된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야훼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이다(예레 31:34, 에제
36:38,37:28, 이사 43:10).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순수 인간적 지성으
로는 깨달을 수 없는 바 역사라 칭하여지는 인간적 성취 안에서 비로
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 내 행위자로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 및 온 세계백성을 위한 약속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미가
4:5,6:3이하, 예레 11:5, 신명 4:37, 출애 32:13, 이사 41:8이하, 창
세 9:1).

신약성서: 신약성서는 결정적 계시자로서의 예수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계시관에 입각하여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이
충만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빛이고 진리이
며 계시자이다. 그러나 바울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신비의
내용-계시된 자-이 된다. 어쨌든 '계약',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백성'등의 신.구약의 근본 개념들은 신약성서의 여러 귀절들을 통하여
결국 구약성서의 옛 계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약속이 구약성서의 하
느님 상(像)과 함께 새로은 계약인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3:6) 계시의
충만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가 연결됨을 기술하고 있고(로마9장 이하),
구약의 귀절들을 요한복음93:9)은 아드님의 증거로서 얘기하고, 갈라
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3:15)는 신앙인들을 아브라함의 유산으로 간
주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진술들은 모두 예수가 구약성서의 약
속이 충만된 하느님의 계시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세사 안에서 모든 약속의 충만이기 때문
이다.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삶을 원하시는 생활하신 하느님의 자기 계
시이다. 하느님은 약속의 말씀과 약속 충만의 업적 사이에서, 즉 과거
로부터 현재를 뛰어넘어 개방된 미래에로 뻗쳐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계시는 예수를 뛰어넘지는 않지만, _바로 예수 안
에서 충만된 계시이므로-예수의 약속의 충만 안에서 인간의 구원이 존
립 가능하므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속 작용한다. 그러므로 계시는
역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고, 충실한 말씀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하
느님의 말씀이고, 충실한 말씀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 말씀의 역
사인 것이다.

3. 교의신학적 의미: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계시는 초세계적인 하느님
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는 먼저 행위 자체
로서의 계시인 능동적 계시(revelatia activa)와 계시된 것을 의미하
는 수동적 계시(revelatia passiva), 이중의 측면에서 고찰된다.제 2
차 바치칸 공의회는 초자연적 계시는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을 인류에게 열어 보이셨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천명함으로써, 계
시의 개념을 순수 지성적으로 추구하려는 경향을 배척하고 있다.이 초
자연적 계시는 역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나고(계시헌장 3항),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하느님의 창조업적인 피조물 안에서 자연적 방법으로 하느님의 계
시가 파악되기도 한다(자연적 계시, reveltio naturalis). 그러나 피
조물의 자연적 인식가능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계시(revelatio
supernaturalis)는 고유의 의미에서 계시라 불려진다.

초자연적 계시는 내용적으로 다시 구분될 수 있다. 죽은 후에 영
원히 축복받게 되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열어 보이시므로, 이
축복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완
전히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계시를 영광의 계시(revelatio gloriae)
라 부른다(로마 8:18이하, 1베드 1:5 참조).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에
게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신비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
으로 초자연적 실재인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말씀계시) 하느
님의 신비를 표현하는 상상이나 개념들은 유비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하느님을) 거울에 비추
어 보듯이 희미하게 본다"(1고린 13:12)고 하였다.하느님은 초자연적
인 말씀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업적계시로 부르
신다.그러므로 자연적 신인식은 구세사와의 맥락 안에서 가능하다. 또
한 초자연적 계시는 일반 구세사 전반을 의미하는 일반적 초자연적 계
시와 특수한 구세사, 즉 신.구약 성서에 담겨진 내용을 의미하는 특별
한 공적 직무적 계시로 구분되기도 한다.

전달되는 진리가 신비로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조저히 파악할 수 없
을 대 초자연적 계시라 부른다.초자연적 말씀계시가 모든 사람들을 위
한 것일 때 공적 계시(revelatio publiea)라 부르고, 다만 한 개인에
게만 해당되는 계시는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라 부른다. 그리
스도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의 결정이고 종결임은 신앙의 진리이다. 그
리고 공적계시의 확실한 선포는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끝났다는 것
은 적어도 신학적으로 확실하다. "로마 교황과 주교들은...새로운 공
적 계시를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 들이는 일은 없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25항)

계시의 중계방법에 따라서, 하느님의 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지는
계시를 직접적 계시(revelatio mediata)라 부른다. 구원의 신비의 초
자연적인 공적 계시는 근본적으로 인류를 위한 간접적 계시인 것이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 교회사 연구소,p.80-82)

*계시의 하느님
하느님은 당신을 주님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하느님의 위대하심
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도 하셨
다.

하느님은 당신을 구원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셨다. 하느님은 구세사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런 사건들을 수반하고 그 의미를 명백히
하는 계시적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게 하셨
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아주 다른 분이시고 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
물과도 아주 다른 분이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이 세상을
지나간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존재하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존
재할 뿐이다. 하느님은 본질상 실재이시다. 하느님은 존재하시고 또
살아계실 뿐 아니라,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원천이시다.하느
님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시고 당신의 존재를 이렇게 선
포하셨다. "나는 곧 나다...너는 '나를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출애급기 3,14).

인간은 하느님의 초월적 신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하느님은 영
원하시고 완전하시며 무한한 분이시다. 우리 인간은 일시적이고, 결점
이 있으며, 유한한 존재들이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빈약함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하
느님의 위대하심은 자비의 위엄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아주 초월한 광
휘 속에 계시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관대한 자비로 "우리와 함께 계시
는 하느님"(마태오 1,23)이 되기를 원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적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다.(하나인 믿
음,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한국 신학연구소, 정한교.이경우 옮김, 분
도 출판사,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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